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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전으로 보는 세상]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작성자 : 홍보협력팀
조회 : 630
작성일 : 2021-03-09 15:41:19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300년간 그리스 젊은이의 교과서가 되다
글 · 진단검사의학과 최창수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는 기원전 8세기에 나온 책으로 초등학생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독하는 책이다. 이 책의 국역판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천병희 교수가 그리스어에서 직역한 『일리아스』(2007,숲)가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문학과 역사가 혼합된 이 책은 3천 200여 년 전에 일어난 트로이아(Troia) 전쟁의 한 부분을 서사시로 완성한 것이다. 호메로스는 4세기 동안 구전돼 오던 것을 책으로 저술했다. 이 책에는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 연합군이 헬레네라는 한 여인을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되어있지만, 흑해 주변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곡물 수송의 요충지에 있는 트로이아 지역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위대한 장군도 있고, 평범한 병사도 있다. 특이하게도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명기되어 있다. 이들은 저마다 탁월한 덕목들을 보여준다. 등장하는 인물들 중 아킬레우스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용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전우 파크로클로스 사이에 전개되는 아름다운 우정도 보여준다. 오디 세우스는 놀라운 인내심과 지혜를 보여주고, 필로스의 노왕 네스토르는 노쇠하여 전투에 직접 참여는 못 하지만 장군들의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조정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트로이아의 헥토르는 패장이 되었지만 아름다운 효심, 형제애, 조국애를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고대 그리스 7현이나 소피스트들이 출현할 때까지 근 300년 동안 이 책은 그리스 젊은이들의 교과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만 5천 693행에 달하는 이 방대한 서사시의 절반은 연설문으로 되어 있다. 장군들과 병사들은 전투를 하기 전 자신들이 왜 싸우러 왔는지, 왜 이겨야 하는지에 관해 연설을 한다. 표면적으로는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헥토르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비평가들은 대체로 네스토르가 ‘호메릭 맨(Homeric man)’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호메로스의 이상적인 인간상 즉, '연설도 잘하고 행동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원고 없이도 자신의 의견과 신념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일리아스』에서 네스토르는 말한다. 인간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운명에 과감히 맞설 때뿐이라고. 바꿔 말하면, 운명에 과감히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평생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순풍에 돛 달고 항해할 때는 어떤 배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 우리 삶도 그렇다. 최악의 위기를 최고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힘, 평소에는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는 잠재력은 바로 운명과의 싸움 속에서 잉태된다.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나 파리스의 최후가 아닌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이 장대한 서사를 끝맺음하는 이유는 뭘까.
호메로스는 ‘인간 세상에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거나 ‘어느 편이 그래도 좀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후 남기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헥토르를 잃고 목 놓아 우는 트로이아 사람들의 눈물은 사랑하는 것을 잃고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닮았다.
헥토르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찾는 인간의 의지. 지위도 사랑도 가족도 생명마저도 다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그 무엇을 찾는 인간의 멈출 수 없는 투쟁. 자신의 끝을 예감하면서도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못다 이룬 꿈과 삶의 온기를 아낌없이 전달하려는 의지. 그 속에 인간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민주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행복은 자유 안에 깃들어 있고, 자유는 용기 안에 깃들어 있음을 안다면, 전쟁의 위험에 당당히 맞서라”는 요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패장 헥트로로 생각된다.
운명에 맞서는 자만이 쟁취하는 아름다움은 고통을 극복하는 순간에는 묘한 희열이 있다. 고통에 굴복하고 쉬운 해결책을 찾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오직 고통과 싸워 이기는 사람만이 홀로 체감할 수 있는 환희가 있다.
호메로스의 문장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전쟁 장면을 실제처럼 그려보도록 한다. 이렇게 그려진 장면들은 독자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각인되어 평생에 걸쳐 작동하고 다시 이 책을 읽도록 만든다. 여러 번 읽으면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덕목들이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내재화될 것이다.
이번 호부터 서양 고전을 알기 쉽고, 흥미롭게 소개하는 '서양 고전으로 보는 세상' 연재를 시작합니다.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고전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일상적인 대화에서 위대한 대화로 나아가도록 안내합니다.
최창수 임상병리사는 ‘위대한 저서 읽기 프로그램(Great Books program)’을 이끄는 비영리교육기관인 파이데이아 아카데미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All men naturally desire knowledge’(Aristotel, physics, 980a22)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지성을 향한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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