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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탐방]일본 나가사키, 원폭을 말하다

작성자 : 홍보협력팀  

조회 : 215 

작성일 : 2020-03-02 10: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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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탐방]일본 나가사키, 원폭을 말하다

 

•사진 이귀자 (인공신장실)

 

 

!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때는 바야흐로 1945891102.

버섯 모양의 지옥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1초도 안 되는 0.01,

찰나의 순간에 생명체는 사라지고 시계는 영원한 순간에 있었다.

 

일본 NASHIM(나가사키 피폭자 국제협력회)초청 연수 45

처음 접해보는 해외 연수라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출발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김해공항을 빠져나와 일본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현청 시청 직원과 통역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한국 적십자사 소속 간호사 5, 한국 원자력 소속 3, 브라질 의사 2명이 합류하여 일정을 함께 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 동안 나가사키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어촌 마을은 고요하게 아름다웠다. 첫날은 숙소에 입소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첫 일정은 9시부터 나가사키 현청에서 오리엔테이션으로 시작했다. 현청의 넓은 실내 공간은 온통 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다. 편백나무의 싱그러운 향이 콧속을 간지럽히고 자연의 향은 낯선 이방인의 마음을 완전 무장 해제시켰다.

 

현청 직원이 피폭자에 대한 지원정책, 피폭자 의료법률 제정(일본인에 한정), 한일 조약 협정(한국에 5억 불 지원), 한국에 있는 피폭자 지원, 피폭자 원호법 제정, 피폭자 지원 수첩신청, 수당지급 개시, 의료보험 조성, 법률개정, 피폭자 원호법 개정(건강관리 수첩 발급) 등 피폭자 지원에 대한 정책을 연도별 브리핑하였다. 피폭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부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은 원폭피해자들이 입원해 있는 적십자 병원으로 이동하였다.

좁은 복도 계단을 올라 회의실에 도착하니 병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분들이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다. 적십자 병원의 규모는 315병상, 의사 85, 19개 과로 이루어졌으며 연간 외래진료 14, 입원 84,000, 수술 3,000건의 진료 실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병원설립의 목적과 피폭자들의 진료 현황, 추적 조사, 피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의무기록 보관법 등의 설명이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진료기록 차트의 분량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었다. 차트보관 선반을 나열하면 족히 5km가 넘는다고 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진료기록 보관은 유효기간이 없다고 한다. 후대의 연구 자료로 영원히 보관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충분히 보존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종이차트로 보관함에 따르는 화재 발생을 우려해 할로겐기체 소화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종이의 변질 및 훼손의 우려가 있어 수 십 년에 걸쳐 전산 작업 중에 있다고 하였다.

 

다음은 나가사키 의과대학 교수의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었다. 나가사키 원폭의 물리적 피해, 물리적 영향, 원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원폭 급 성기, 후 장애 초기, 후기, 역학에 대해서 체계적인 교육이 있었다. 영어의 이해력이 부족한 탓에 다소 무리는 있었으나 의학용어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고 부교재로 위안으로 삼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특징은 폭풍과 화재에 의한 엄청남 파괴가 순간적으로 발생하였고 폭발력은 통상적인 화약(TNT) 21kt(21,000t)에 해당하며 일반적인 폭탄과 비교해 훨씬 강력한 폭풍과 고온 상태가 발생했다. 거대한 폭풍과 열선(복사열)은 물론 방사선도 방출되어 총에너지의 폭풍 50%, 열선 35%, 방사선 15%가 방출되었다고 추정하였다. 나가사키 인구 24만 명에 사망 74천 명 중상 75천 명으로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0~5세까지 어릴수록 피해가 컸고 해마다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1km 이내 화상이 96.7%, 외상 96.9%가 사망했고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도 94.1%가 사망했으며 폭심지에서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피해가 심각했다.

피폭으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질병이 백혈병, 폐암,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순으로 발병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나가사키 원자 폭탄은 Fat man(팻맨)이라고 불렀으며 재료는 플루토늄으로 503m 상공에서 폭파되도록 설계되어있었다. 핵물질인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자체로는 크게 위험하지 않으나 어떤 조건이 주어지게 되면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어마 무시한 파괴력이 있다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일본에서는 인류 최초 원폭 피해국이라는 명제를 안고 원폭의 위험성과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포퓰리즘(Populisme)을 펴고 있는 듯하였다.

 

! 비운(否運)의 탄식이 나온다

아무런 죄도 없고 이유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처참한 일을 당해 살아가는 시민의 고통이 소름 끼치게 가슴 아팠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는 그날의 참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학교는 초토화가 되었고 여학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데 도시락에 새겨진 이름이 그였음을 알려주었다. 딸 대신 도시락을 부여잡고 처절하게 울부짖었을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건물들은 무너져 잔해로 어지럽고, 복사열로 사람의 모습 그대로 익어버린 사진, 형상을 알아볼 수도 없는 널브러진 뼛조각들, 길바닥에 쌓인 시체들이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었다. 찌그러진 괘종시계의 시침이 1102분에 멈춰있었다. 그날 영원히 멈춘 시간을 알려주는 듯 했다. 사람들은 당시 열선의 화기로 인해 물을 찾아 몸부림쳤다. 갖은 먼지, 기름, 방사능에 오염된 검은 강물에 뛰어들어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강물 속에는 물 반, 사람 반이었단다. 피폭자들이 죽어가면서 느낀 가장 큰 고통이 갈증이었다. 원혼을 달래고자 원폭 자료관 곳곳에 비치해둔 수반에는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무고한 자의 죽음은 살아 있는 죄인의 속죄를 위한 것이라고 했던가? 그 뜻은 숭고함이었다.

 

나가사키는 천주교 성지로도 알려졌다. 천주교 박해가 심하여 몰래 신앙생활로 명맥을 유지한 우라카미 천주당, 수많은 성도가 원폭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목이 잘려나간 조각상들과 훼손된 건축 잔해들이 곳곳에 남아 그때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지금은 재건된 성당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하였다.

 

특히 천주교 신자이면서 나가사키의 성인으로 알려진 나가이 다카시, 그의 생애를 잊을 수가 없었다. 나가사키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지만, 중이염 후유증으로 난청이 있어 방사선학을 전공하였단다. 그 당시 결핵 환자는 많았고 물자는 충분치 않아 방사선 필름 없이 방사선을 환자와 같이 쏘이면서 진료를 하였다는 말에 가슴이 아렸다. 1000명의 사진을 찍었다면 천 번 방사선에 노출되었다는 이야기다. 기가 찰 노릇이다. 드디어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기대 여명은 3년이었다. 19456월에 진단받고 8월에 나가사키 원폭이 터졌다. 나가사키 대학에서 본인도 중상을 입었지만 개의치 않고 구호활동에 전념하였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부인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살아만 있다면 기어서라도 찾아 올 사람인데. 집을 찾아가니 부인이 지니고 있었던 천주교 묵주 로사리오와 뼛조각만 발견되었다. 몇 년 뒤면 자신의 시신을 거둬야 할 사람이 처참히 사라져버렸다. 피를 토하는 통곡의 소리는 메아리가 되었을 것이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손에 바늘만한 무기라도 지닌 자 평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라며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 오직 파괴만 있을 뿐이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오로지 평화를 부르짖으며 생을 마감한 나가이 다카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그의 참담한 심정이 영상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병상에서 10권의 책을 집필하였다. 책 속에 한 마디 한 마디는 뼈에 사무친 외침이자 절규였다. 몇 구절을 읽었지만, 오직 평화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가 낳은 천재이자 의인이었다.

 

올해는 원폭이 발생이 된지 75년째다. 피폭자 중 가장 젊은 사람이 75세라는 얘기다. 조만간 원폭 피해자들은 영원히 사라 질 것이다. 이 지구상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평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추모비 앞에서 잠시 원혼들을 위해 묵념을 했다. 고통과 분노, 절망과 슬픔 모두 잊고 편히 쉬시라고, 힘이 된다면 이 땅에 평화를 달라고 염치없이 기원했다.

 

자유와 평화, 이토록 눈부신 것을

우연히 참가하게 된 일본연수, 원자폭탄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다. 이름도 생소한 NASIM(Nagasaki Association for Hibakushas’ Medical Care), Atomic bumb(원자폭탄), Hypocenter(폭심지), Littie boy(꼬맹이), Fat man(뚱뚱이)이라는 원자 폭탄의 이름도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한국과 일본이 정치적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시국이다. 이에 대해 일본도 민감한 반응을 보임을 알았다. 정치적 흐름과 민간인 교류의 행보에 대해서 방송국 PD도 신문사 기자도 우리들의 여론을 알고 싶어 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앞장 서주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우연히 인터뷰의 기회를 얻어 NHK 방송국 매스컴도 타게 되었고 신문 기사에도 실리는 영광을 얻었다.

내생에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이었다.

 

원폭의 상처는 망각의 역사 속으로 깊숙이 묻혔다.

산은 푸르게 높았고 바다는 깊게 흐르고 있었다. 일본 3대 나가사키 로프웨이의 야경, 수 천 만개의 불빛은 원폭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얄밉도록 반짝이고 있었다.

자유와 평화, 이토록 눈부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