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길잡이

작성자 : 김기둥  

조회 : 3934 

작성일 : 2003-03-06 10:04:54 

“기둥아 일어나라!”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큰누나 아기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단다.
병원에 같이 가자”한밤중에 진통이 온 누나 걱정에 홀로 집에 남아 밤을 지새고는 새벽에 순산했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잠들었던 터라 멍하니 있던 나는 화들짝 잠이 깼다. 산부인과 의원 문을 들어서자 분만실 안에 자형과 아버지 친구분인 원장님, 그리고 간호사 한 명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뭔가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보니 그들 틈으로 작고 새하얀 아기 발이 보였다.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일단 누나가 있는 회복실로 들어섰다. 누나는 울고 있었다. 자신이 임신 중에 몸 관리를 잘 못해서 아기가 저런 거라고... 산통이 채 가실 겨를도 없었을 텐데 누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뇌에 문제가 있어 호흡기능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아기를 서울대 병원 신경외과로 이송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던 터라 내가 뭐라고 물으면 어머니는 이내 치료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께서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전날 저녁 아기가 사망했다고... 불과 세상 빛을 본지 7일 만이었다. 그날 밤새 나는 울어댔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 하얀 발바닥 밖에 못 본 내 조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고통만을 안겨준 세상이 너무나 미안했고 옆에서 지켜봐 주지도 못한 내가 너무나 죄스러웠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마땅히 진로를 정하지 못하던 나는 여러 날을 고민 끝에 의사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나에게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너무 감정에 쏠려 진로를 결정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제일 먼저 말한 이는 바로 큰누나였다. 나는 누나에게 말했다.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인생에는 계기라는 것이 있지 않겠어? 의사가 되어 조카와 같은 아기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건방진 생각으로 성급히 내린 결정이 아냐. 다만 의사가 되면 아주 소중한 기회를, 어려운 이들을 누구보다도 마지막까지 곁에서 지켜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특권’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내린결정이야. 내가 그런 면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릴 기회를 준 사람이 바로 내 조카야.”
지금 운좋게 외과의사의 길을 걷고 있는 나는, 중요한 진로를 결정하는 매 순간마다, 힘이 들어 후회하고 포기하고싶을 때마다, 내 능력의 한계에 절망할 때마다, 고3 겨울의 그날을 떠올린다. 아가의 작고 하얀 그 발이 눈앞에 밟히면 해이해졌던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된다.
길잡이일 뿐만 아니라 나를 훈계하고 채찍질하는 조카에게 나는 늘 고마워하고 있다.
내 능력의 한계에 절망할 때마다, 고3 겨울의 그날을 떠올린다

<김기둥 / 일반외과 전공의 2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