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에세이

봄을 맞는 그대에게

작성자 : 고정애  

조회 : 3884 

작성일 : 2003-03-12 09:36:58 

요즈음 산에 가면 나뭇가지마다 봄빛과의 해후를 기다리는 푸른 유전자들의 힘찬 합창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조만간 산 전체에 연두빛 밑그림이 올라오고 바람이 좀 더 따뜻한 모습으로 물살 위를 건너오면 사람들 가슴엔 산수유꽃 그림자가 구름처럼 흩어지리라.사실 계절 중에 봄이 제일 좋아진다는 건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과 함께 가슴이 순해지기 때문 아닐까. 봄은 나무들을 통해‘비워냄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진리를 전해주건만 욕심많은 인간들은 그 진리를 읽기보다 그저 화려한 꽃들과 푸른 나뭇잎만을 반가워하는 단순 시각적 차원에서 머물고 만다.불투명한 의료계의 현실속 삭막하기만한 병원 뜨락에도 봄은 오고 비어있던 자리마다 여기저기 새로운 얼굴들이 새싹처럼 싱그러운 인사를 하고 있다.이 곳까지 오게된 그들의 이정표는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무슨 꿈을 안고 이 어려운 곳까지 왔을까.

● 그대는 神이 선택한 공인
혹시 히포크라테스나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정신보다 번지르한 자본주의의 부와 경제 안정논리가 그들을 유혹했다면 지금이라도 그분들의 영혼에 죄의식을 갖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숙명적인 사명감으로 왔노라 마음 속 깊이 고백해야 하리라.아름다운 선배들 없이 사랑스런 후배가 있을 수 없고 그러한 선 후배들의 창조와 모방없이 의료계의 역사는 오늘 날까지 위대한 성장을 이룰 수 없었으니 그 관계의 틈엔 사랑과 보살핌이라는 진정한 마음의 교류만이 끈끈한 접착제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경제성장과 과학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기존의 사회정의들마저 변질되어가는 세상이라해도 의료인들에 대한 사회 정의와 기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의료인은 神이 바빠서 지상에 올 수 없으므로 神을 대신해서 우리를 보냈으니 우리들은 선택되어진 공인이다. 즉 나보다는 타인의 생명을 생각하며,철저한 책임의식으로 인간과 사회에 기여하는 공인인 것이다.그러기에 우리의 길은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 神에게 선택되어진 우리의 운명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대 환자 곁을 떠날 수 밖에 없는가
누군가 길 위에서는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짊어지며 걸으니 더욱 아름다우리라.그러나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위에도 봄만 되면 몸살기가 그림자처럼 누워있다.그 좋은 봄도 병원 입장에서 보면 결코 반가워만 할 수가 없게 된다.새 정부 수립과 함께 소문 속에 도사리고있는 춘투의 색깔과 벌써부터 어느 병원이 집중적으로 찜 당할거라는 이야기가 봄바람 속에 나부끼고 있으니 말이다.더우기 새 정부가 의료계에 던질 카드도 만만찮을 거라며 긴장을 하고 있는 가운데 어차피 물 흐르는대로 두면 시간은 지나고 뒤엉킨 매듭도 풀린다지만 그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피 흘리는 사람들은 환자들일테고 그 환자의 피해사실 조차도 병원과 정부,노조 탓으로 서로 서로 돌린다면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이번에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갈등과 분열로 새겨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차츰 봄빛도 물러가고 나뭇잎들의 움직임마져 짙은 초록으로 더해지는 유월,전국의 대학병원들 특히 간호부들은 으슬으슬하던 몸살기가 독감으로 변해 들어보지도 못한 합병증에 시달리게 된다.이 시기에 우연한 말 한마디가 생각지도 않은 정의의 심판대로 이끌려 만신창이가 되기도하는 것은 좋은 의미의 말도 마음만 먹으면 뜻하지않게 전혀 상반된 내용으로의 변질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원래 인간성향이란 동전의 앞 뒤처럼 양면적이라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부정적 분위기의 상반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또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 대부분이 의리와 권익옹호라는 명분 아래 환자 곁을 떠나 묵묵히 제 자리 지키는 사람들의 손 끝을 의욕상실에 빠지게 하더니 한 때는 의사들마저 의료현실의 개혁을 외치며 환자 곁을 떠났었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에는 원인과 이유가 있고 자기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처세술을 갖는다지만 나 역시 삶을 흠뻑 살아온 도사도 아니고, 그래도 그렇지....때로 인간이해에도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성장없이 노동없고 노동없이 성장도 없건만 우리는 왜 그 좋은 봄만 되면 착취니 압박이니 팽팽한 긴장 속에 눈에 힘을 주고 몰려 다녀야할까.이맘 때 쯤이면 매너의 기본 상식과 아름다운 언어들은 어디로 잠적하는 걸까.봄이 오는 길에서 화합과 상생의 노래를 부르기 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한 투쟁의 노래 뿐이니 노사가 함께 어깨동무하며 봄을 노래하는 날이 우리에게도 있을까...

● 열정과 책임감으로 환자 곁을 지키는 그대는 누구인가
타이타닉 영화를 보면 연주를 망설이는 한 악사에게 "그들이 언젠 우리의 연주를 들었어?" 라며 침몰해가는 갑판 위에서 승객들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실내악단의 의연한 모습은 차라리 비장하기까지 하다.죽어가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승객들을 위한 철저한 직업의식과 책임감이었을 것이다.얼마 전 일흔 다섯의 코미디언 배 삼룡씨는 심장병을 수술한지 한 달 만에 혼신을 다하는 연습 후 마지막 각오로 예정된 무대에 서서 관객들의 감동을 자아냈다고한다.“관객과의 약속을 위해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더라도 무대를 떠날 수 없다”는 그의 프로의식과 책임감은 해마다 환자 곁을 떠나는 우리에게 부끄러운 교훈으로 다가온다.물론 환자 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회환경과 의료현실도 문제겠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그러한 사태들이 반복되어서는 안되겠다.서울에서 이 십여 년 전 이 곳으로 근무하게 된 나는 매 해 며칠간의 연휴 명절에도 하루 빠짐없이 아침 일찌기 병실회진을 하시는 교수님을 보며 잔잔한 감동을 받곤한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 아름다운 세상 속으로 합류할 수 있는 행운을 얻는 것은 아닐까.
열정과 책임감은 내 인생을 지탱해주는 나무뿌리와 같고 예술가나 과학자,운동선수,장인,위대한 사람들의 부모들도 그 열정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개인의 행동 하나 하나에는 주관적인 철학과 윤리,열정,종교관 등으로 조각된 나만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하나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물줄기가 되는 것이다

●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대도 변하고 고급화,대형화,국제화 바람 속에 사람들의 기대수준도 예전 같지 않아 기왕이면 깨끗하고 편리한 시스템의 환경시설이 중요하겠지만,뭐니뭐니해도 감동이란 시설과 기계가 아닌 사람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배려,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므로 의료인들의 친절한 설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진정한 간호란 행위에 앞서‘고통스럽고 답답한 환자의 속 마음을 읽어주고 친절하게 표현해주는 일’이다.힘들어할 때 누군가 곁에서 내 마음을 알아줄 때의 고마움은 영원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인간적인 향기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며 특히 우리 의료인은 인간적인 이해와 봉사,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전제로 직업의식이 형성되어지므로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듯이 환자들도 우리 의료인들에게서 실력이나 능력과 함께 따뜻한 사람냄새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살면서 가지말아야 할 곳으로 병원과 경찰서,감옥을 말하며 우리는 우스개로 우리나라의 환자와 죄수들의 공통점을 늘어놓지만 그냥 웃을 일만은 아닌 것 같다.이제 우리는 어떤 이유로든 가지말라는 병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그렇다면 타 전문인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어야 하지않을까.나무의사인 우 종영씨도 아픈 나뭇가지 하나를 쳐 낼 때 사람들 눈에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나무 입장에 서서‘나무야 힘내라’며 줄기를 쓰다듬은 후 나무도 살아있고 아파하는 생명체요 인간의 친구이기에 함부로 쳐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할 일은
1인자유기업가를 선언한 공병호씨는‘이제 직장은 더 이상 충성대상이 아니지만, 내게 일감을 주는 고객이기에 당연히 최선을 다해 고객(직장,병원)을 섬기고 서비스를 제공한 다음에 그에 맞는 댓가를 받아내야한다’고 말하지만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엽기적인 논리로 의무보다는 권리만을 외치고 요구를 위한 요구만을 외치는 우리나라의 사회현실은 어쩔 것인가.해마다 어려워지는 병원경영의 혁신적인 전략수립과 설상가상으로 3년 뒤의 의료시장 개방에 대한 숙제들이 발등의 불이라 갈수록 첩첩 산 중이라는 병원입장 속에서 이제는 병원도 외국은 못 갈망정 서울로 가야한다는 분위기들이 지방병원을 더 힘들게하고 있다.이래저래 지방병원도 긴 겨울잠에서 깨어 심상치않은 봄빛을 온 몸으로 느끼고 깨달아야만 그 뜨거운 여름을 견뎌내지 않을까.
끝으로 올 한 해도 의료사고 없고 상생의 단협으로 무파업 선언,나아가 의료수가와 의료정책의 현실화,국민들의 병원과 의료인들에 대한 긍정적 사고전환을 바랄 뿐이다.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않고 스스로의 성장과 변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살아가는 지혜를 베푼다.그러나 인간에겐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창조,변신을 통한 탄력적이고도 선택적인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주어진 환경을 극복 하지 못하고 눈 비비고 앉아 변화와 성장만을 꿈 꾼다면 일찌감치 우리는 새로운 세상과 그 발전을 위해 기꺼이 썪어지는 밑거름이라도 되어야 할 것이다.
(간호부 교육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