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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한·일 교류의 장(場), 녹동서원과 달성 한일우호관

작성자 : 홍보협력팀  

조회 : 346 

작성일 : 2018-01-09 13: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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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서원 사진

·일 교류의 장(), 녹동서원과 달성 한일우호관

 

 

녹동서원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 장수 김충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789년에 건립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년에 철거되었다가 1885년에 영남 유림과 김충선 장군의 후손들이 합심하여 재건하였고 1972년에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서원에는 사당인 녹동사와 향양문, 유적비, 신도비 등이 있다.

 

향양문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으로 남쪽 고향을 향하여 건립되어 있다. 충절관에는 임진왜란 때 사용되었던 조총을 비롯한 김충선 장군의 유품과 한·일 양국의 역사 문화 및 임진왜란 관련 전문도서와 목판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일 간의 문화 교류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적에서 아군으로, 녹동서원 배향 인물 김충선

김충선 장군은 일본 장수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사야가(沙也加). 임진왜란 때, 사야가는 가토 기요마(加藤淸正) 휘하의 선봉장이었으며,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하지만 1주일 후 김충선은 당시 경상좌우병사 김응서에게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조선의 장수가 되었다. 이후 김충선 장군은 울산, 경주, 영천 등에서 8차례 왜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고 18개의 성을 탈환하였다. 아군에게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격술을 전파하였다. 원래 왜군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왜군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후 자청하여 북쪽 변방에서 근무하였으며,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도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삼란공신으로 불렸으며, 김충선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말년에는 낙향하여 향리 교화에 힘쓰다 1642년에 별세하였다.

 

현재 가창면 우록마을에는 김충선 장군의 후손 30여 명을 비롯해 2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우록마을은 김충선 장군이 1600년에 사슴과 벗하는 마을이란 뜻으로 우록동으로 고친 후 정착하면서 지금까지 4백여 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달성 한일우호관

김충선 장군의 박애 사상을 기리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해 2012년에 녹동서원 옆에 달성 한일우호관을 개관하였다. ·일 화합의 공간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공부와 체험 학습장으로 좋은 곳이다. ·일 교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관을 비롯해 3D 영상실, 예절교실은 한일우화관을 방문한 국내 관광객과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한·일 문화교류와 화합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체험을 통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에 대한 효,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으며, ·현대 일본의 의상, 유물, 전통의상 등을 전시해 우리나라와 일본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비교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조총과 당채목각촛대, 김충선 장군의 문집이 전시되어 있고 일본식 정원, 전통놀이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는 김충선 장군을 매국노라고 칭했으며, ‘조선이 꾸민 자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었다. 하지만 70년대에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동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으며, 이제는 당시 김충선 장군의 정신을 이해하고 이곳을 찾는 일본인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주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

운영시간 : 09:30~18:00(동절기 11~209:30~17:00)

전화번호 : 053) 659-4490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가창2)

출처 : 달성한일우호관(녹동서원) 제공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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